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48

달팽이의 꿈 / 이윤학

저수지 - 이윤학 하루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속에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리속엔 손바닥만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거네 거꾸로 박혀있는 어두운 산들이 들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들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오동나무 - 이윤학 그의 빈속으로 들기 위하여 나는 그 나무를 자를 수는 없었다 깊은 생각으로 불면의 나뭇잎을 흔들었는데, 쥐어뜯었는데 달빛이 한 바가지 쏟아져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어오르고 있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멀리멀리 떠나고 고요하여라, 바닥에 떨어진 부채 입을 모으며 ..

글,시 2024.01.09

달이 떳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 문향란 -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없다. 더듬어보면 우리가 만난 짧은 시간 만큼 이별은 급속도로 다가올 지도 모른다. 사랑도 삶도 뒤지지 않고 욕심내어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서로에게 커져가는 사랑으로 흔들림 없고, 흐트러지지 않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할 뿐이다. 외로움의 나날이 마음에서 짖궂게 떠나지 않는다 해도..

글,시 2023.05.29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승(女僧) -백석- ​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

글,시 2023.04.05

불노리 / 주요한

빗소리 - 주요한 -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날 같고 볕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두운 밤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불노리 -주요한 -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놀 .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

글,시 2023.03.15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추억에서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글,시 2022.12.16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 수 권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여승(女僧) - 송수권 -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

글,시 2022.10.08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 ​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굽이 돌아가는 길 -박노해- ​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라난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

글,시 2022.06.24

풀꽃 / 나태주

풀꽃1 - 나태주 -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 풀꽃2 ​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 아, 이것은 비밀. ​ ---------------------- ​ 풀꽃3 ​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지혜)에 실린 시들입니다 부탁이야 - 나태주 - 오래가 아니야 조금 많이가 아니야 조금 네 앞에서 잠시 앉아있고 싶어 나는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금방 보고 헤어졌는데도 보고 싶은 네 얼굴 금방 듣고 돌아섰는데도 듣고 싶은 네 목소리 어둔 하늘 혼자서 반작이는 나는 별 외론 산길에 혼자서 가는 나는 바람 웃는 네 얼굴..

글,시 2021.10.17

눈 위에 남긴 발자욱 / 용혜원

눈 위에 남긴 발자국 -용혜원- 밤새 하얀 눈이 내려 온세상이 하얗다 눈 덮인 새벽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려니 마음이 상쾌하고 즐겁다 온통 하얀 세상을 보니 내 마음에까지 눈이 내린 듯 하다 눈을 밟으며 걷노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행복은 늘 주변에 있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하늘에서 복을 내려 주는 것만 같다 오늘은 하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만들며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련다 눈 내리는 밤 - 강소천 -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 하고 싶다.

글,시 2020.03.17

사랑하는 별하나 / 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 나도 별과 같은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와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사람이 될수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싶다. 외로울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사람 하나 갖고싶다 빈 산이 젖고 있다 - 이성선 - 빈 산이 젖고 있다.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산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글,시 2020.03.10

봄 시

봄 - 송수권 - 언제나 내 꿈꾸는 봄을 서문리 네거리 그 비각거리 한 귀퉁이에서 철판을 두들기는 대장간의 즐거운 망치소리 속에 숨어 있다 무싯날에도 마부들이 줄을 이었다 말은 길마 벗고 마부는 굽을 쳐들고 대장간 영감은 말발굽에 편자를 붙여가며 못을 쳐댔다. 말은 네 굽 땅에 박고 하늘 높이 갈기를 흔들며 울었다 그 화덕에서 어두운 하늘에 퍼붓던 불꽃 그 시절에 빛났던 우리들의 연애와 추수와 노동 지금도 그 골짜기의 깊은 숲 캄캄한 못물 속을 들여다보면 처릉처릉 울릴 듯한 겨울산 뻐꾸기 소리...... 집집마다 고드름 발은 풀어지고 새로 짓는 낙숫물 소리 산들은 느리게 트림을 하며 깨어나서 봉황산 기슭에 먼저 봄이 왔다. 그리운 이 그리워 - 오세영 -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

글,시 2019.03.21

가을 시

만추 - 정태현 푸른 하늘 흰 구름 높아만 가면 나는 몰라라 나는 몰라라 내 마음을 그 누가 가져가 바람 부는 언덕에 나 홀로 앉아서 애꿎은 풀잎만 뜯어 날리네 바람소리 갈잎 소리 밀리어 오면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 나도 모를 이 마음을 어이해 노을 지는 숲길을 홀로 거닐면 낙엽은 떨어져 가을만 깊었네 그대여 가을입니다 - 김설하 선홍빛 나뭇잎 우수수 떨어져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면 시리도록 파란 하늘 머리에 이고 문득 어디라도 떠나고 싶은 그대여 가을입니다. 따가운 햇볕 쏟아져서 섬세한 손길 쓰다듬으면 햇곡식 찰랑찰랑 살 붙는 소리 햇과일 단물 드는 냄새 육혹하는 그대여 가을입니다 느티나무 숲에서 온 산들바람 잠 못 이루는 그대 창가 기웃거리면 홑이불 목선까지 끌어올리고 귀뚜라미 자장가에 소록이..

글,시 2017.11.21

정든 유곽에서 / 이성복

정든 유곽(遊廓)에서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병(病)을 돌보던 청춘(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일본(日本)인가, 일식(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

글,시 2016.01.21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 원태연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원태연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많은 괴로움이 자리하겠지만 그 괴로움이 나를 미치게 만들지라도 미치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하나의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추억은 떠나지 않은 그리움으로 그 마음에 뿌리깊게 심어져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기다림 원태연 가장 고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전화를 걸지요 고된 날에는 망설임도 힘이 들어 쉬고 있을테니까요 가장 우울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편지를 쓰지요 우울한 날의 그리움은 기쁜 날의 그리움보다 더욱 짙게 묻어날테니까요 고된 일을 하고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날이면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을 달래며 ..

글,시 2016.01.04

이해인 수녀님과 법정 스님의 우정어린 편지와 시

이해인 수녀님과 법정스님의 우정어린 편지와 시 이해인 수녀님의 맑은 편지 법정 스님께... 스님 스님,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 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며칠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을 남기는것들 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

글,시 2015.12.29

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1970년대 골목길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갈대 언제부턴가 갈..

글,시 2015.01.21

눈길 / 고은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귀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를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

글,시 2014.09.18

가슴에 담아 두고픈 좋은글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일은 가슴아픈 일입니다.하지만 더욱 가슴아픈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람에게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느끼는지 차마 알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기 전까지는 그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얻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한 의미로 다가왔지만결국 인연이 아님을 깨닫고 그 사람을 보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기까지는 1분밖에 안걸리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기까지는 1시간밖에 안걸리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하루밖에 안걸리지만 누군가를 잊는데는 ..

글,시 2014.07.24

번뇌(煩惱) / 법정 스님

번뇌(煩惱) - 법정 스님 - 보고 싶은 만큼 나도 그러하다네 하지만 두 눈으로 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네 마음으로 보고 영혼으로 감응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함께일 수 있다네 결국 있다는 것은 현실의 내 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한 하늘 아래 저 달빛을 마주보며 함께 호흡을 하며 살고 있다네 마음 안에서는 늘 항상 함께라네 그리하여 이 밤에도 나는 한사람에게 글을 띄우네 그리움을 마주보며 함께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네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욕심을 가지지 마세 내 작은 소유욕으로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그의 마음을 보살펴 주세 한 사람이 아닌 이 세상을 이 우주를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함과 큰 믿음을 가지세 타인에게서 이 세상과 아름다운 우주를 얻으려 마세 내 안의 두 눈과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내..

글,시 2014.03.13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흐르는곡 Les larmes de Joie / Oliver Toussaint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저문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 흐르는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한자루에..

글,시 2013.04.04

국경의 밤 / 김동환

국경의 밤 - 김동환 - 第一部 1 "아하, 無事(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男便(남편)은 豆滿江(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國境江岸(국경강안)을 警備(경비)하는 外套(외투) 쓴 검문 巡査(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奔走)히 하는데 發覺(발각)도 안 되고 無事(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密輸出馬車(밀수출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 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脈(맥)이 풀려져 파! 하고 붓는 魚油(어유) 등잔만 바라본다. 北國(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고 村民(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妻女(처녀)만은 잡히우는 男便(남편..

글,시 2013.03.19

낡은 집 / 이용악

낡은 집 - 이용악 -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느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

글,시 2013.03.07

귀천(歸 天 ) / 천상병

歸 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광화문 근처의 행복 광화문에, 옛 이승만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論說委員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기어코 나의 단골인‘아리랑’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차값을 내고그리고 천원짜리 두개 주는데- 나는 그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원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귀찮아! 귀찮아!’ 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글,시 2012.02.18

목마와 숙녀 / 박인환

목마와 숙녀 - 박인환 -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

글,시 2012.01.10

초 혼 / 김 소 월

초 혼(招魂) - 김 소 월(金素月) -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虛空) 중(中)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웠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못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

글,시 2008.11.21

어느하오 / 신동집

어느하오 - 신동집 - 아이들이 갖고 놀다 버린 풍선(風船)이 떴다는 말다 시름없이 방안에 딩굴고 있다. 아이들엔 이미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추석(秋夕)의 뒷날, 아이들은 어딘지 밖으로 나가 메우지 못한 제마다의 꿈을 찾고 있는지 마당귀엔 망가진 잠자리채도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 혼자 남아 있으면 상념(想念)은 유동(遊動)하는 미립자(微粒子)와도 같이 흔들리는 풍선(風船)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오(下午) 한나절 해 그늘은 여물고 한동안을 잠기는 라디오의 바로크. 뜰에 핀 너댓 그루 장미는 조만간 찬 바람에 시들고 말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를 더 피어서 내 눈을 적시게 해 줄 것을 바랄 뿐이다. 바람 차면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투명(透明)한 玉(옥)빛 정밀(靜謐)이 헐벗은..

글,시 2008.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