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산천초목 2022. 6. 24. 21:56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굽이 돌아가는 길    -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라난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길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길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길입니다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이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본명 박기평) 
출생 / 1957년 11월 20일 전남 함평
학력 / 선린 상업고등학교
데뷔 / 1983년 시와경제 '시다의 꿈' 등단
대한민국의 시인, 노동운동가, 사진작가.
1984년 27살에 쓴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금서였음에도 100만 부가 발간되었으며
이때부터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렸다.
안기부에 체포되어 1990년대 감옥에가서 사형을 구형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1998년 광복절 특사로 플려납니다 

 

1991년 사형을 구형받고 환히 웃던 모습은 강렬한 기억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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