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불노리 / 주요한

산천초목 2023. 3. 15. 12:44

 

빗소리     - 주요한 -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날 같고

볕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두운 밤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불노리    -주요한 -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놀 .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 ?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별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 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어시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절믄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여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기름자를 멈출리가 이스랴?

 

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업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사라도 죽은 이마음이야,

에라 모르겟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와 버릴가,

이 서름 살라 버릴가,

이제도 아픈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앗더니

겨울에는 말랏던 꽃이 어느덧 피엇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도라 오는가,

찰하리 속 시언이 오늘 밤 이 물 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상히 녀겨 줄 이나 이슬가......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니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펄덕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에 살고 십다.

저긔 저 횃불처럼 엉긔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십다고

뜯밖게 가슴 두근거리는 거슨 나의 마음 .

4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노픈 언덕 우헤 허어혀켜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불비체 물든 물결이 미친 우슴을 우스니,

겁 만흔 물고기는 모래 미테 드러벡이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조름오는 니즘의 形象이 오락가락-----

얼린거리는 기름자,

닐어나는 우슴소리,

달아 논 등불 미테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뜯밖에 정욕(情欲)을 잇그는 불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업슨 술도 인제는 실혀,

즈저분한 뱃 미창에 맥업시 누으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업슨 쟝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니는 욕심에 못 견듸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여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뜯잇는드시 삐걱거리는 배잣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샹한 우슴이다.

차듸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우슴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긔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곳추 너의 뱃머리를 돌니라.

물결 끝에서 니러나는 추운 바람도 무어시리오.

괴이(怪異)한 우슴 소리도 무어시리오,

사랑 일흔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의게야 무어시리오,

기름자(그림자) 업시는 발금(밝음)도 이슬 수 업는 거슬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노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셜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아츰 처녀         - 주요한 -

새로운 햇빗이어, 금빗 바람을 니르켜, 니르켜,
나의 몸을 부러 가라, 홧홧 달은 니마를, 뺨을, 두 귀를-
나의 강한 애인에게 나의 뜻을 가저가면서.

이슬에 저즌 길이어, 빗나라, 빗나라, 나에 아페
스스로 가진 힘을 의심 업시 깨닷기 위하야.
빗나라 잠 깨기 시작한 거리거리어
불붓는 동편 하늘로 숨차게 거러갈 에.

아름다운 새벽이어 둘너싸라.
희고 흰 새벽 안개여 더운 젓통을 씨스라
나의 깨끗한 살의 단 냄새가
모든 강한 애인의 가슴에 녹아들기 위하야.

아, 땅이어, 붓들라, 나를,
너의 질긴 플 줄기로 나의 버슨 발을 매어
시언치 아는 이 몸을 너의 플밧헤 끄러 업지르라.

이슬에 저즌 아츰이어, 빗나라, 빗나라, 그때에
안탁가운 나의 사랑을 뜨거운 그의 가슴에 비최기 위하야...

 

출생/ 평안남도 평양 (1900. 10. 14. ~ 1979. 11. 17.)
시인, 언론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학력 후장 대학교
데뷔1919년 시 '불놀이'
1961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일보사 사장,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1960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
1965 대한무역협회 회장,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민주당 민의원
 

호 송아(頌兒). 평남 평양(平壤) 출생. 초등학교 졸업 후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와 도쿄[東京] 제1고등학교를 거쳐 3 ·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후장[江]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和信商會) 중역으로 있었다. 8 ·15광복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 ·경제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국회의원을 거쳐 4 ·19혁명 후 장면 내각 때는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5 ·16군사정변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메이지학원 재학중에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하는 한편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문하에서 근대시를 공부하다가 1919년 《창조(創造)》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문단에 진출했다. 1919년 《창조》 1호에 발표한 시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로 한국 최초의 근대 자유시로 평가되며 근대 자유시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의 시는 대체로 밝고 건강한 서정을 드러내며 섬세한 우리말을 시어로 즐겨 사용했다.그 후 계속 〈아침처녀〉 〈빗소리〉 등, 낭만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간행했고, 그 밖에 이광수(李光洙) ·김동환(金東煥)과 함께 펴낸 《3인시가집(三人詩歌集)》(1929)이 있다. 한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친일 문필활동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