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산천초목 2023. 4. 5. 23:39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승(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리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바다         - 백석 -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든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에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가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  백석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 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 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고담)하고 素朴(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고야(古夜)              - 백석 -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딴 집에

어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뒤로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굴린다는

땅아래 고래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금은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매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 보는 때

나는 이불속에 자지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가즈랑집          - 백석 -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山)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山)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山)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백석(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지면 익성리 출생)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어머니 단양이씨 이봉우(李鳳宇)사이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1924년 그는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당시 오산학교 학생들은 문학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는데 백석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라 일본어 교육에 신경쓰지 않아, 일본어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당시 독립운동가 조만식도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백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준수하고 출중하며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백석은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있다가,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백석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에서 유학하며공부에만 전념하며 어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학년 영어 마스터,  2학년프랑스어,  3학년 러시아어를 집중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교내의 교회에서 외국인 교수들과 자유로이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오야마 학생들에게 경이감을 선사할 정도로 유창했다 한다. 정작 영어사범 전공이면서도

정식 수업은 독일러를 들었고, 독일어 교수는 그를 무척 아끼며 애제자로 여겼다 한다.

해방 이후 북에서는 수많은 번역에 집중하였고, 이때는 주로 러시아문학에 집중했고,

일부 프랑스문학, 중국문학도 번역했다.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며 등단하였으며,

당선작은 농촌에서 일어난 남녀의 불륜을 공동체의 소문 형식으로 그려낸 인간의 욕망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1935년 시 『정주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다. 해방 이후 고향인 이북에서 문예 활동에 전념했으나,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논조로 인해

1960년대 즈음 북한문단에서 숙청당했다.이후 량강도 삼수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외 지도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문단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한국에서는 월북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언급을 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부터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절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