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 이윤학
하루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속에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리속엔 손바닥만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거네
거꾸로 박혀있는 어두운 산들이
들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들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오동나무 - 이윤학
그의 빈속으로 들기 위하여
나는 그 나무를 자를 수는 없었다
깊은 생각으로 불면의 나뭇잎을
흔들었는데, 쥐어뜯었는데 달빛이 한 바가지
쏟아져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어오르고 있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멀리멀리 떠나고
고요하여라, 바닥에 떨어진 부채
입을 모으며 부서지는 추억,
벌레는
벌레는, 저렇게 높은 곳에서 무얼 하나?
측백나무 2 - 이윤학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생각난다. 너를 보면
황혼 속으로 파묻히는 순결은 말이 없고
너는 왜 흔들리지 않느냐, 흔들리지 않느냐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너는 먼 산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 산
나는 먼 산을 보고 넘고 싶었다.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버드나무 - 이윤학
자신이 만든 그늘에 고개 숙이고
평생을 살 여자 있다면, 그
그늘 밑에 신문지 깔고 눕고 싶네
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 가짜인지
알고 싶네
버드나무 그늘 벤치에서, 헤
입 벌리고 잠든 남자들
떠나기 위해
매미들은 악을 쓰며
울고 있네
그 여자의 숨소리,
아주 작은 머리카락 흔드는 소리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것들이
헤매게 하네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같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달팽이의 꿈 - 이윤학
도피처가 되지도 않았다
보호색을 띠고 안주해 버림이 무서웠다
힘겨운 짐 하나 꾸리고
기우뚱 기우뚱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얼굴을 내밀고 살고 싶었다 속살을
물 위에 싣고 춤추고 싶었다
꿈이 소박하면 현실은 속박쯤 되겠지
결국은 힘겨운 짐 하나 벗으러 가는 길
희망은 날개로 흩어진
또한 운명의 실패를 감아가며
덤프 트럭의 괴력을 흉내라도 내자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도 늘 제자리는 안될 걸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입으로 깨물면 부서지고 마는
연체의 껍질을 쓰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청소부 - 이윤학
누워있는 것도 벽이었다. 출근길 서둘러 밟고 온
보도블럭에도 무늬가 있었다. 단색 세포처럼 또박 또박
놓여 있었다. 밟히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기우뚱거리며
빗물을 토해 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을 만들며 스스로 자라야 했다.
한 번쯤 앞서고 싶은 길
바람을 견딜만큼 몸으로 주름이 잡혔다.
지워지는 혈관을 찾아 나는 불안하게
흔들려야 했다.
햇살은 구름 사이로만 쏟아졌고 아이들은 티눈처럼
자라 있었다. 엉킨 뿌리를 들고 일어났다.
태풍이 겹겹으로 껴입은 주름을 더듬고 갔다.
그리고 바람이 통 없는 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흔들릴 때 아름다웠다.
껴안은 모든 것들 속에서 너희들을 동티처럼
부활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소문없이 떨어질
나를 위해 남아 있어야 했다. 깨끗한 너희들,
밟히는 족족 주름을 벗고 탄생하는 은행알들
무너지는 담을 떠받치고 있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
휘어지고 미끄러져 땅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무너지는 담은 힘겨운 짐이었고
그 짐은 덜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기울었을 뿐
담은 무너지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가고,
마른 나뭇가지 밑에서
이파리가 피고 있다
푸른 불꽃이 타고 있다
더 미끄러질 곳 없어
허리 부러지는 나뭇가지,
결딜 수 없는 짐을 지고
절벽을 타오르고 있다
겨울에 지일에 갔다 2 - 이윤학
경운기의 짐칸이 버려져 있다
그곳은 양지바른 곳이다. 늙고
병든 사람들의 차지다
그들 앞에는 연못이 있다. 산과 헐벗은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그들은 그렇게 앉아서도 지팡이를 하나씩 잡고 있다
대나무 숲이 그늘로 지운 우물은 덮여 있다
담쟁이 넝쿨은 돌담을 가려주고 있다
돌담 위에 나무 막대기가 새워져 있다. 빨래들이
그 나무 막대기를 잡아 당기고 있다
널린 지 오래된 빨래들
주렁주렁, 고드름을 달고 있다
닫힌 문 앞에 여자가 서 있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서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릴 모양이다.
눈 위에 서 있는
수십 그루의 늙고 초췌한 배나무,
철조망 안에서
무수한 요지부동의 내가 들어서 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스쳐 자나간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온 것인가
저 철조망은 여러 군데 벌어져
밖을 삼키고 있다
나는 구멍 속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엔
여러 갈래의 샛길이 있었다
길들은 창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창고 안엔 부서진 나무 궤짝들이 쌓여 있었다.
그곳은 상엿집같이 음침했었다
그곳의 처마 밑에는
파란 풀들이 돋아나 있다
구멍 속의 길을 바라본다, 나는
구멍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아니다
내가 여태껏 달고 있는 열매들은
허연 봉지 속에 쌓여 있다, 그
열매들은 떨어져 박살나지 않았어도
이미 버려진 것이다
철조망 속에는 지금,
나로 인해 상처받은
한 사람의 내면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바위산 나무들 - 이윤학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끝이 없는 안간힘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낭떠러지에 매달려,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나무들
바위를 파먹고 살아가야 하는 나무들
녹빛의 이파리
그 불꽃이 꺼지지 않고,
오래 타들어간다
비틀린 몸이, 드릴처럼
바위 속으로 뿌리를
박아넣고 있다
금간 바위 틈으로
나무 뿌리가 박혀 있다
끝없는 집착의 길이
지하로 나 있다
뒤뜰의 봄 - 이윤학
장독대 위에는
번들거리는 검은 단지들이
뚜껑을 덮고 있네
앵두나무 두 그루
구석에 붙어 있네
앵두나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환한 꽃을 피우고 있네
서둘러 꽃을 피우고
시들어 가려 하네
잎이 나기 전에
시드는 꽃을 피우는 나무는
저주받은 거라는 말이 떠오르네
수많은 눈 같은 꽃송이들,
한 여자가
뒤뜰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네
196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외에 다수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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