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스페인Spain
언어 ; 에스파냐어
면적 ; 5,059만 6,400㏊ 세계49위 (2015 국토교통부, FAO 기준)
인구 ; 4,639만 7,452명 세계30위 (2018 통계청, UN, 대만통계청 기준)
GDP ; 1조 3,113억 2,001만 5,516달러 세계14위
(2017 한국은행, The World Bank, 대만통계청 기준)
기후 ; 대체로 여름에 건조상태가 심한 지중해성 기후이지만 국지적으로는
대서양의 영향을 받는 곳도 있다. 북서부와 칸타브리아산맥, 피레네산맥일대에서는
비교적 비가 많아 연간 강수량이 1,500mm를 넘는 곳도 있지만,
레온 지방과 지중해 쪽의 무르시아 지방은 강수량이 적어 연간 400mm 이하이다.
내륙지방도 강수량이 적은데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여 국지적으로는
스텝또는 사막과 같은 경관을 나타낸다. 이에 비하여 북동부의 카탈루냐 지방은
이탈리아, 프랑스의 리비에라 지방의 기후와 비슷하며 해안은 겨울에도 비교적 온난하다.
건조한 기후조건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생에 부적당하여 민둥산과 척박한 다갈색 토양이
주를 이루며 북부의 산지에서만 삼림을 볼수있다.
전국토 중 경지는 11%, 초원은 18%, 산림지대는 56%이다. )
종교 ; 가톨릭 74% 이상
스페인의역사
스페인 이베리아반도에서 구석기시대의 인종으로 현재 확인되고 있는 최고(最古)의 인종은 크로마뇽인(人)으로 그들의 문화를 특징짓는 동굴회화(洞窟繪畵)가 많이 남아 있다. 산탄데르(Santander)의 서쪽에 있는 대표적인 알타미라 동굴회화는 BC 1만 5,000년 경의 것이며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회화와 함께 유명하다. 신석기시대는 적어도 BC 3,000년대에 시작되었다.
BC 1000년경부터 수세기에 걸쳐 철기문화를 가진 켈트족이 프랑스로부터 이주해 와서 이베리아족과 혼혈하였으며, 갈색 피부, 검은 머리칼을 특징으로 하는 켈트이베리아족이 형성되어 스페인 민족의 중핵이 되었다.
스페인의 중세는 이슬람으로부터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는 그리스도교도의 운동, 즉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14세기 후반 스페인은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강대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1479년 아라곤(Aragon)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가 카스티야(Castilla) 여왕 이사벨(Isabel)을 아내로 맞이함에 따라 스페인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후 30년전쟁(1618~48), 부르봉 왕조의 스페인 지배에 따른 스페인 계승전쟁(1701∼14) 등으로 신흥 해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크게 번성하였고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적 쇠퇴기에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황금시대를 맞았는데 16세기 말부터는 세르반테스(Cervantes), 로페 데 베가(Lope Feliz de Vega Carpio) 등의 문학자, 엘 그레코(El Greco), 벨라스케스(Velasquez), 무리요(Murillo) 등의 화가들이 활약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스페인은 국가체제의 재건을 꾀하였다. 1759년에 즉위한 카를로스 3세 시절에 플로리다 블랑카(Florida Blanca) 백작을 비롯한 개화한 정치가들이 계몽전제주의적 관념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였다. 중상주의(重商主義) 대신 경제자유주의가 추진되고 공업원료의 수입세가 철폐됨으로써 카탈루냐 지방에 미국산 원면(原綿)을 사용한 면직물 공업이 발달하였다.
그 후 1830년대부터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을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카탈루냐의 공업노동자들에게 러시아 출신 바쿠닌(Bakunin)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소개되어 대토지 소유제 아래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을 자극, 1869년 카탈루냐·안달루시아에서 공화주의자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난 데 이어 1873년에는 최초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들의 운동은 공화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 공장·토지 점거로 확대되었다. 혁명 진압을 위해 부르주아지는 부득이 봉건세력과 동맹하게 되어 1875년에 알폰소 12세의 왕정복고가 실현되었다
1876년의 헌법에는 입헌군주제와 제한선거제가 규정되었으나 필요에 따라 헌법을 정지시키는 권한이 정부에 부여되었으며 또한 가톨릭의 국교화를 규정하였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먼로주의의 영향 등으로 아메리카 식민지는 20년대에 태반이 독립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의 패배에 따라 쿠바와 필리핀을 잃게 됨으로써 스페인 식민제국은 소멸하였으며 모로코와 아프리카의 일부만이 식민지로 남았다
1885년 알폰소 12세가 28세 나이로 죽자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1902년까지 섭정을 한다. 1902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알폰소 13세는 농업문제, 지방독립운동, 노동공세(攻勢) 등이 얽힌 만성적 사회·정치 위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독재(1923∼30)하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세계공황에 따른 경제 악화로 군사독재와 함께 군주제마저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자주 반정부 폭동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정치불안을 이용하여 왕당파(王黨派)와 교권(敎權) 파시즘을 내세운 세다당(CEDA) 등이 득세하여 1933년에 우익 정권이 성립되었다. 1934년 10월 세다당원의 입각을 계기로 아스투리아스의 광산 노동자들이 혁명 코뮌을 결성하고 무력으로 맞섰으나 결국은 진압되었다. 이 후에 사회당 계통의 노동총동맹(UGT)과 아나키스트 계통의 전국노동연합(CNT)이 제휴하여 1936년 사모라 대신 아사냐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