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배경의 자화상(Self-Portrait in Red)
1940년대, 18X10.5cm, 나무판에 유채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이 죽는 순간을 나 나름대로 표현해 본 것이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 <<해당화 : Sweet Brier Flowers>>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cm, 호암미술관 소장
1944, Oil on canvas, Collection of Ho-Am Art Museum, Yongin
▲ 아리랑 고개
1934, 57.5X77.8cm, 종이에 수채, 호암미술관 소장
▲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X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 가을 어느날
1934, 96X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 정물(해당화)
1940년대 후반, 48.5X31.5cm, 종이에 수채
1936년 24세에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김옥순과 결혼한 그는 귀국 후
장인되는 김재명의 남산병원 3층에 현대식 화실을 꾸며
안정된 가운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40년 상처하고 실의에 잠기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1947년 김창경과 재혼하면서 이듬해 서울 동화화랑에서 재기전을 갖게 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그는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1950년 장남 채원군이 탄생하고 제2의 전성기가 열리는가 했지만
그 해 11월 4일 그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35.5X45cm, 종이에 수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백장미 : White Reses>>
1940, 나무판에 유채, 45.3X37.3cm
1940, Oil on wooden board
▲ <<어촌(덕적도 풍경 : Fishing Village)>>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32X41cm, 개인소장
later 1940's, Oil on canvas
이인성 작. <자화상(Self-Portrait)> 1950,나무에 유채, 26.5X21.8cm
이인성(李仁星, 1912.8.28 ~ 1950.11.4)
서양화가 주요수상 :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창덕궁상(1935)
주요작품 : 《경주의 산곡에서》 《실내》
대구(大邱) 출생. 보통학교를 나온 뒤 서동진(徐東辰)에게 사사,
수채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1930년 도쿄미술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제전(帝展)에 출품, 수차 입선하였다.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제전에서는 준특선,
1937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8년 개인전,
1940년 김인승(金仁承)·심형구(沈亨求)와 함께 3인전을 가졌으며,
개인 아틀리에를 열어 후배를 양성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8·15광복 후는 이화여고 교사를 지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작품 경향은 인상파적인 감각주의에서 그의 이국 취향과 토속적 소재를 발전시켰다.
작품으로 《경주(慶州)의 산곡에서》 《실내》 등이 있다.
'한국의 고전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원 김홍도 (0) | 2008.12.15 |
---|---|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0) | 2008.11.25 |
혜원 신윤복 (0) | 2008.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