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새벽 편지 / 곽재구

산천초목 2008. 6. 24. 15:24

 

새벽 편지     - 곽재구 -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사평역에서        - 곽재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첫 눈 오는 날       - 곽재구 -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긴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 꽃 한 송이
방싯 꽂아 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또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흔들리는 나뭇잎,
가로등의 어슴푸레한 불빛,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 목소리조차
마음의 물살 위에 파문을 일으킨다.
 
외로움이 깊어질 때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밤새워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빈 술병을 보며 운다.
지나간 시절의 유행가를
몽땅 끄집어 내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이의 집에 전화를 걸어
혼곤히 잠든 그의 꿈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아예 길가의 전신주를 동무 삼아 밤새워 씨름하다
새벽녘에 한움큼의 오물덩이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도 있다.
나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외로울 때가 좋은 것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 점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사랑이 찾아올 때......
그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길을 걷다 까닭 없이 웃고,
하늘을 보면 한없이 푸른빛에 가슴 설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모르는 이에게도
'안녕' 하고 따뜻한 인사를 한다.
사랑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호젓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찾아온 삶의 시간들을
충분히 의미 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곽재구의 포구기행 中에서 -
 

 

The Star of the Sea

 

곽재구(19541. 1. ~  ) 전남 광주시인, 순천대학교 교수
전남대 국문과 졸업.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시집:<사평역에서>,<전장포아리랑>,<한국의 여인들>,<서울 세노야>등
김진경,윤재철,박몽구 등과 함께 「오월시」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음

'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하오 / 신동집  (0) 2008.09.04
고향 앞에서 / 오장환  (0) 2008.07.14
고적한 밤 / 한용운  (0) 2008.06.11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0) 2008.06.04
겨울바다 外 / 김남조  (0) 2008.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