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도종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 내리는 길 -도종환-
당신이 없다면 별도 흐린 이 밤을
내 어이 홀로 갑니까
눈보라가 지나가다 멈추고 다시 달려드는 이 길을
당신이 없다면 내 어찌 홀로 갑니까
가야 할 아득히 먼 길 앞에 서서
발끝부터 번져오는 기진한 육신을 끌고
유리알처럼 미끄러운 이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져도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기로 한
이 길을 함께 가지 않으면 어이 갑니까
스쳐지나가는 많은 사람중에
당신이 함께 있어서 내가 갑니다
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당신이 그 눈발을 벗겨주어
눈물이 소금이 되어 다시는 얼어붙지 않는 이 길
당신과 함께라면 바람과도 가는 길
당신돠 함께라면 빗줄기와도 가는 길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혼미하여 뒹굴다가도
머리칼에 붙은 눈싸락만도 못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당신이 항상 함께 있으므로 오늘 이렇게 나도 갑니다
눈보라가 치다가 그치고 다시 퍼붓는 이 길을
당신이 있어서 지금은 홀로도 갑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 개 햇살을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 날 몇 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1954 ~ )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하여 작품활동 시작.
시집:<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당신은 누구십니까>등
흐르는곡 Pavane / Cees Tol(1947년생)과 Thomas Tol(1950년생)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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