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 어떤 개인날 >
- 미명(未明)에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친구여, 찬물 속으로 부르는 기다림에 끌리며 어둠 속에 말없이 눈을 뜨며. 언 창가에 서서히 새이는 밤 훤한 미명, 외면한 얼굴 내 언젠가 버려두는 자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어둠 속에 바라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처럼 이끌림은 무엇인가. 새이는 미명 얼은 창가에 외면한 얼굴 안에 외로움, 이는 하나의 물음, 침몰 속에 우는 배의 침몰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 저녁 무렵 누가 나의 집을 가까이한다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으리 닫은 문에 눈 그친 저녁 햇빛과 문 밖에 긴 나무 하나 서 있을 뿐. 그리하여 내 가만히 문을 열면은 멀리 가는 친구의 등을 보게 되리. 그러면 내 손을 흔들며 목질(木質)의 웃음을 웃고 나무 켜는 소리 나무 켜는 소리를 가슴에 받게 되리. 나무들이 날리는 눈을 쓰며 걸어가는 친구여 나는 요새 눕기보단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
- 박명(薄明)의 풍경
눈 멎은 길 위에 떨어지는 저녁 해, 문 닫은 집들 사이에 내 나타난 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살고 깨닫고 그리고 남몰래 웃을 것이 많이 있다. 그리곤 텅 비인 마음이 올 거냐. 텅 비어 아무 데 고 이끌리지 않을 거냐 우는 산하(山河), 울지 않는 사나이, 이 또한 무연(無緣)한 고백이 아닐 거냐. 개인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스산한 바람소리 뻘밭을 기어다니는 바다의 소리, 내 홀로 서서 그 소리를 듣는다. 내 진실로 생을 사랑했던가,
즐거운 편지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즘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1938 ~ ) 서울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5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시집:<어떤 개인 날>,<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미시령 큰바람>등 시인 황동규는 우리시대 흔치 않은 지성파 시인으로 불린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그의 시는 한국시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