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사모곡 / 김춘수

산천초목 2008. 5. 7. 20:30

 

 

 



 사모곡                         - 김춘수 - 

주신 사랑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주신 말씀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오밤중에 전기불 꺼지듯 나 삽니다.

하느님 나는 꼭 하나만 가질래요.
세상 것 모두 눈 감을래요.
하느님
나는 꼭 그 사람만 가질래요.

산엔 돌치는 징소리
내가슴에 너 부르는 징소리.
솔밭이 여긴데 솔향기에 젖는데
솔밭도 나도 다 두고
넌 어디쯤서 길 잃었니.

나도 바람이더면 아무대나 갈껄
그대 가는 곳 어디라도 갈껄
내가 물이라면 아무대나 스밀껄
그대 몸 속 마알간 피에라도 스밀껄



능금              - 김춘수 -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갈대 섯는 풍경           - 춘수 -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 김춘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태생 / 1922년 11월 25일 ~ 2004년 11월 29일 경남 통영 
데뷔 / 1946년 사화집 '애가' 등단                                                              
학력 / 니혼대학교 문예창작 중퇴
                                                             
경력 / 1991년 KBS 이사
                                                             
수상  /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