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푸른 오월 / 노천명

산천초목 2008. 5. 6. 23:28
 
 

푸른 오월     -노천명-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남사당(男寺黨)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노천명(盧天命,1912~1957). 황해도 장연 출생.
5세때 홍역으로 사경을 넘겼하여 본명인 기선(基善)을
천명(天命)으로 고친 채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남장으로 자랐다.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 졸업.
이화 여자 전문 영문과 졸업.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다. 1932년 <신동아>지에 <밤의 찬미>를 발표한 이후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해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6년 <이화 70년사>를 편찬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57년 3월에 뇌빈혈로
입원했다가 6월에 사망했다. 시집으로는 <산호림>(1938),<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3),<사슴의 노래>(1958),<노천명 시집>(1972)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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