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고적한 밤 / 한용운

산천초목 2008. 6. 11. 19:11

 



 

고적한 밤 - 한용운 -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탈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꺾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 손을 마주잡고

눈물의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죽임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잊고자  
 - 한용운 -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을까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하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되고

끊임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죽음 뿐이기로

남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충남 홍성출생. 속명(俗名)은 유천(裕天), 자는 진옥(眞玉),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용운은 법명(法名)이다.
백용성 스님과 함께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민족 대표로 서명,
'독립선언서'에 공약3장을 추가하고, 거사 당일 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용운의 생애는 사상과 문학이 자연스럽게 합일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랑의 예술적 실천화에 성공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음.
한용운은 한국 근대사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과 문제점을 첨예하게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민족의 선구자인 동시에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성취함으로써 문학사의 한 획을 그어준 시인.
특히 인간에의 정신과 그 실천 의지는 생생한 민중적인 정감과 민중적인 언어에
맞닿음으로써 시적 설득력을 획득하게 됨.
1925년, 시집<님의 침묵>을 펴내었다.
남긴 작품으로는 시 107편, 시조 35수, 한시 164수, 소설 5편,
수필 20편,논문 16편, 잡문 15편이 있다.


흐르는곡  Jeg Ser Deg Sote Lam (당신곁에 소중한 사람)  - Susanne Lunde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