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칼 Portugal
수도 : 리스본
언어 : 포르투칼어
면적 : 92,090㎢ 세계111위(CIA 기준)
인구 : 약 10,839,514명 세계84위
(2017.07. est. CIA 기준) GDP ; 2,028억$ 세계47위(2017 IMF 기준)
기후 : 북부 포르투갈의 연평균강수량은 1,500mm 안팎이며 포르투갈에서도 습윤한 지역으로
해양성(대서양형형)의 온화한 기후를 나타낸다.
그러나 산악지대는 극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국토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연평균강수량 500mm 이하 의 건조지역으로 바뀌며,
겨울에 비가 많이 오는 지중해성이 된다. 또한 포르투갈은 알프스 히말라야 지진대에
속하기 때문에 유사 이래 몇 차례의 대지진이 기록되고 있으며,
특히 1775년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삼림면적은 국토의 28%로
주로 북부 해안지대에 산림이 많고 남부의 코르크나무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
종교 ;카톨릭90%이상
포르투칼의 역사
선사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하여 온 여러 종족의 혼혈로 형성된 켈트계 이베리아인 원주민은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 B.C. 8세기에는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았다. BC 2세기부터 로마의 속주(屬州)가 된 뒤
로마화가 시작되어 루시타니아라고 불렸으며, 로마문화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아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 등 여러 면에서 아직까지 로마시대의 양식이 남아 있다. 그후 고트족등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입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8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1095년 프랑스 왕족 앙리 드 부르고뉴가 포르투갈 백작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시가 테호강 북쪽을 평정하여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고 1143년 포르투갈왕(王)이 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은 1249년에 완료되어 오늘날의 영역이 정해졌다. 남부의 실지 회복운동은 종교기사단(宗敎騎士團)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남부에는 봉건적 귀족령이 형성되었으나 북부에는 일찍부터 자유농민에 의하여 집약적인 농업경영이
이루어졌다.
14세기의 주앙 1세(재위 1385∼1433) 때부터 왕권은 리스본의 상인계급과 결탁, 절대주의화하였으며 영국과의 동맹이
시작되었다. 주앙 1세의 아들 엔히크는 항해왕(航海王)이라고도 불렸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을 비롯한 신항로의 발견에
노력하여 곧 인도항로와 브라질을 발견(1500)함으로써 포르투갈은 해양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경영은 사금과 노예의 획득, 향료를 비롯한 몇 가지 농산물의 수입에 주력하였으며,
수도 리스본은 각지로부터 유입된 부(富)의 집산지로써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부는 왕실과 귀족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들의 낭비와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귀금속을 비롯한 부가 국외로 유출되어 국내 부르주아는 형성되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국내에서는 반종교 개혁의 중심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또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슬람· 인도· 고딕풍(風)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 마누엘 양식이 확립되는 등 독자적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하였다. 《우스 루지아다스》로 유명한 국민시인 카몽이스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1572년에 출판된 이 불후의 명작은 포르투갈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비견되는 웅장한 국민적 서사시이며, 그 주제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항로발견 등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것이다.
1578년 세바스티안왕(王)이 북 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한 뒤, 1580년부터 60년 동안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640년 브라간사공(公)이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어 다시 독립을 쟁취, 브라간사공은 주앙 4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의 경제적 종속이 점차 심화되었으며, 1703년에는 메스엔 조약에 따라 영국공예제품의 자유로운 수입이 인정되고 낮은 관세로 포르투갈산(産) 포도주의 영국 수출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브라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도 점차 네델란드 영국의 진출에 의해 축소되어갔다.
18세기 후반에는 퐁발이 예수회(Jesuit 會)의 해산 등 국내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정책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봉건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실패로 끝났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하여 왕실 일족은 브라질로 망명하였으며, 영국· 포르투갈 연합군과 프랑스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영국 장군이 섭정(攝政)으로 부임,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나 1820년에 에스파냐 내란에 호응하여 반영국(反英國) 입헌파(立憲派)의 혁명이 일어나 국왕이 복귀하여 입헌 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822년에 최대의 식민지인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해 갔다. 프랑스 혁명사상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도 근대화를 겨냥한 여러 가지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의 산업기반이 취약하여 중산층의 성장이 어려웠으므로, 중앙은행의 설립 등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으며, 반대로 19세기에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항쟁의 와중에서 1908년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왕자가 암살되었고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共和派)의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공화제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쿠데타가 되풀이되고 노동운동도 격화하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측에 가담, 참전하게 됨으로써 국력은 피폐해졌고 경제적 위기는 극도로 심화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독재정치를 유발하여 1926년에는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장군 코스타의 독재정권이 출현하였으나 이 정권은 경제정책의 실패로 실각하였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카르무나는 1928년 코임브라대학 교수 살라자르를 경제장관으로 기용하여 재정의 전권(全權)을 맡기고 극단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하여 3년 만에 경제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살라자르는 1932년 총리가 된 뒤 1933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무솔리니를 모방하여 공화제적 조합국가(共和制的組合國家)의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살라자르는 비밀경찰을 창설하고 검열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국민연합당 이외의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조치 등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1969년 살라자르가 신병으로 사임하고(1970년 사망), 카에타노가 후임이 되었으나 국내 반체제파(反體制派)의 불만이 고조됨과 동시에 아프리카 식민지 등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세계 최후의 식민지제국’이라고 불리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카에타노 정권의 탄압정책은 여러 차례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1974년 4월 민주화를 목표로 군부 소장파 장교들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르투갈의 쿠데타 후 군부는 산업 국유화 등 국내의 사회주의화에 착수하였다. 독재정권시대의 유일한 정당인 국민연합당은 해체되고 새로운 정당들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쿠데타 후 대통령에 취임한 스피놀라 장군은 좌파(左派)의 압력으로 1974년 9월 사임하고 고메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5년 3월에는 스피놀라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 군부가 쿠데타에 실패하여, 스피놀라는 브라질에 망명(1976년 8월 귀국)하였고, 이를 계기로 군부는 좌경화(左傾化)하여 최고군사혁명 평의회가 설치되었다.
1975년 4월 민정이양의 제1단계로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1976년 4월 제헌의회에서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명문화한 새 헌법이 채택되어 이에 근거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에서는 사회당이 득표율 34.9%로 107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어 1원제의 입법의회(정수 263석)가 발족하였다. 이어 6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사회·민주대중·사회민주중앙 3당의 지지로 에아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소아레스를 총리로 하는 사회당 단독내각이 발족함으로써 일단 의회제 민주주의의 형태가 성립되었다. 사회당이 제1당, 민주대중당(현재의 사회민주당)이 제2당이 되어 군부·사회당·민주대중당의 연립정권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군부의 좌경화에 비판적인 사회·민주대중당이 이탈하여 연립정권은 붕괴되고 군부·공산당 연합세력이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후 군부 온건파의 반격 등 정국은 좌우로 동요되어 혼미가 거듭되었다.
경제위기와 당내의 좌우대립으로 고민하던 소아레스 내각은 1977년 1월 총사직하였고, 1978년 1월에는 사회·사회민주중앙당의 연립으로 제2차 소아레스 내각이 발족하였다. 그러나 양당의 대립으로 7월 총리 소아레스는 해임되고 그후 무소속의 다고스타 내각, 핀토 내각, 첫 여성 총리인 핀타실코 내각이 차례로 구성되었다. 1979년 12월 대통령 에아네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임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보수파 연합의 민주동맹(AD)이 과반수를 획득, 사카르네이로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이로써 정치의 주도권은 혁신세력으로부터 보수파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1980년 10월 총선거에서도 총리 사카르네이로의 민주연맹이 재집권하였다. 이어서 1980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좌파의 지원을 받은 대통령 에아네스가 재선되고 이듬해 월프람시스코 핀토 발세마우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발족하였으나 여당 내의 대립으로 8월에 총사직하였으며 9월 제2차 발세마우 내각이 발족하였다.
발세마우 내각은 국유화 정책의 완화, 농민이 접수한 농지의 일부반환 등 자유경제 체제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1976년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사회당과의 타협에 의해 1982년 8월 국회를 통과한 신헌법 초안은 9월 대통령 에아네스에 의해 공포되었다. 한편 발세마우 내각은 대통령과의 마찰로 물러나고, 1983년의 총선거에서는 사회당 서기장 소아레스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발족하였으나 단명으로 끝나고, 1985년 실바 내각이 들어섰다. 1999년에는 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주도로 양당체제가 정착되었으며, 1995년 총선거 결과는 사회당(PS) 112석, 공산·녹색당 연합(CDU) 15석, 사민당(PSD) 88석, 대중당(PP) 15석으로 공산당과 대중당 같은 과격세력이 퇴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97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은 지방선거 사상 최고의 득표율(40.5%)을 기록하였다. 1998년 지방자치 개혁 국민투표에서 정부여당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사회당 및 총리에 대한 지지 여론은 변동이 없다.
총리 안토니우 구테헤스가 이끄는 사회당은 1999년 10월 총선거에서도 승리하여 2기에 들어갔으나 2001년 초부터 경제부진, 정권운영의 혼란 등으로 인하여 총리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 실시된 통일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최대 야당인 사회민주당에 대패하였고 총리는 사임을 표명하였다. 그 결과 2002년 3월 조기 총선거를 실시하여 사회민주당이 1995년 이후 7년 만에 승리함으로써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사회민주당 총재 호세 마누엘 듀라오 바로소가 총리에 선출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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