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명화

르노와르 Pierre A Renoir(1841~1919)

산천초목 2007. 10. 31. 03:00

 

 르느와르 (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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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누아르의 자화상(Self-Portrait), 1910,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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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느깡단베르 양의 초상

 

특별관람석/1874년, 캔버스 유채

 

잠든 나부1897년, 캔버스 유채


시슬리 부부/1868

 

테라스에서/1879년, 캔버스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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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 드 라 갈레트1876년, 캔버스 유채

 


도시에서의 춤

 

시골에서의 춤

 

부지발에서의 춤

 

 Study for "Nude in the Sunlight", 18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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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rl with a Parasol (aka Aline Nunes)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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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rl with Falcon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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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Girl with a Spray of Flowers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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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Young Woman (aka Ellen Andree) 1877

   

 

초원에서 (On the Meadow) 1890, oil on canvas,

 

LA DANSEUSE 댄스 1874년 캔버스 유채

 


샤뚜에서 뱃놀이하는 사람들

 
 

 

 


 

 

屋外에 앉은 여인

 이 그림은 그의 나이 마흔 셋 때의 작품이며, 이 후부터 나부로 옮아가는 시기인데,

후반기에 들어가면 많은 누드를 중심으로 한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누드를 그릴 바에야 누구나 그 그림을 보고 그 유방이나 등을 만지고 싶도록 그려야 할 것이다."

르노와르는 그의 만년에 이렇게 술회했다. 이 그림은 정말이지 유방과 등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고혹이 물씬 풍긴다.화면 가득히 나부를 놓아 삼각형의 구도법을 쓴 이 그림은

부드럽고 풍만한 육체의 질감이 잘 나타나 있다 

 

 

 

 

浴女들

 

 

浴女

 

 

블론드의 목욕하는 여인

 

블론드의 浴女

르노와르의 나부상은 후기에 접어들수록 그 육체의 질감 표현에 있어 풍만함을 보여 준다.

이 원숙한 욕녀상을 르노와르 예술의 진수(眞髓)를 보여 주고 있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나부의 자연스러운 포즈가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어

빨강, 노랑, 녹색 등의 생생하고 순박한 색감을 미묘하게 살리고 있다.

부드러운 필촉이 신선한 색조로 다스려져서, 보드랍고 탄력 있는 여체를 회화적으로 완성시켜,

순수한 감각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

대비(對比)되는 빛깔의 효과에 의해서 육체의 그 어떤 부분도 싱싱하고 발랄하고 탐스러운 풍윤한 감촉을

지니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결코 저속한 관능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 않는,

프랑스적인 감각성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머리를 만지는 慾女

 


피아노 앞의 두 소녀 (1892) 

 

 

음악회에서

  

뜨개질하는 아가씨

  

 소녀의 초상

 

 

 

 

르느와르-

가난한 양복점에서 태어난 르느와르는 13세 때부터 집안을 돕기 위해 일을 해야만했습니다.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리던 그는 자연스럽게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을 친구들과 루브르 안마당에서 보낸 그는 주위의 권유로 20살 즈음부터는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에 있는 에꼴 데 보자르는 많은 미술가를 배출한 프랑스 최고의 국립 미술학교 입니다. 제 친구도 지금 거기서 그림 공부를 하죠. 하지만 가난한 화가의 길은 그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같은 동기이면서 부유한 화가지망생인 바지유 집에 얹혀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르느와르의 초기 작품은 모네, 시슬리, 바지유와 같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1870년에 르누아르는 프랑스-러시아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병때문에 르느와르는 실전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 바지유는 전사했습니다. 이때문에 르느와르는 큰 슬픔에 잠기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출세에 대한 야심은 그를 다시 일어나게 했고 밝고 환한 색채의 풍경화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르느와르 만큼 고객의 호감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린 화가는 별로 없었습니다. 1874년 모네, 르느와르, 시슬리, 피사로, 드가, 세잔 등은 1회 인상파전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비평가들이나 대중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문학살롱에 출입하면서 후원자드을 사귀고, 모델을 찾았습니다.여기서 알퐁스 도데 같은 작가도 만나게 되었구요. 이렇게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은 성공한 예술가나 부유한 지식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40대가 되도록 르느와르는 결혼도 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사귀어 오다가 19세나 어린 알린 샤리고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만난지 5년 후에 아들을 낳고 10년 후에는 결혼을 했습니다. 아마도 출세를 지향하는 르느와르는 알린을 사랑했지만 가난하고 천한 그녀의 신분때문에 결혼을 망설인듯 합니다. 결혼 후 다른 화가들 처럼 르느와르도 끊임없이 유럽 및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의 작품들로 인하여 그의 예술적감각은 더욱 성숙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1895년 즈음에는 그가 제작한 나체화로 재정적인 성공을 얻게 됩니다. 게다가 1900년에는 훈장도 받고 가장 위대한 프랑스 화가의 한사람이라는 명예도 거머쥐게 되구요. 하지만 류마티즘 관절염이 걸리면서 그의 건강이 기울어졌습니다. 결국 75세가 되어 더이상 붓을 잡을 수 없었느나 붓을 팔에다 고정시키고 팔레트는 무릎위에 놓고도 놀라운 속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전히 인생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나체화를 그렸습니다. 기가 막히는 열정이죠. 하지만 1919년 11월 폐으로 인해 르느와르는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프랑스라는 국가가 구입한 "피아노앞의 두소녀"와 현란한 "물랭 드 라 갈라뜨",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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