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 - 남인수 -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세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봄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다운 이강산에 봄맞이 가세
사람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청춘은 언제 또 피나
낙화유수 / 소리사랑
남인수(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 처음 이름은 강문수(姜文秀)이다.일설에 의하면,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이 최창수(崔昌洙)였으며, 북한 인민배우 최삼숙이 그의 조카라고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그의 학력은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이 일제시대 학적부를 통해 확인된다.
1935년 말에서 1936년 초 경에 시에론(Chieron)레코드사의 가수로 선발되었고, 1936년 2월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다. 1937년 오케(Okeh)레코드사로 이적, 1938년 이부풍(李扶風) 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었고, 1943년까지 전속가수로 130여 곡을 발표했다. 한편 1938년 발표된 「기로의 황혼」은 치안방해의 명목으로 가두연주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1965년 월북작사의 이유로 방송금지곡 1호로 지정되었다.
1942년 「강남의 나팔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를 비롯해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에서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軍と僕]」(감독 허영)의 동명 주제가인 「그대와 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등을 불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음반제작이 중단된 1944년 이후로는 약초(若草)가극단 등에 소속되어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44년 9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의 「성난 아시아[怒りの亞世亞]」에 출연했다.
광복 이후 음반 제작이 많아, 여러 악극단에서 무대공연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음반 제작이 재개된 1947년 이후 「가거라 삼팔선」 등을 불렀고, 1948년에는 아세아(Asia)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1949년 발매된 「여수야화」의 경우 정부와는 다른 입장에서 ‘여순(麗順)사건’을 다루어 판매금지를 당했다. 6·25 전쟁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을 했다. 이후 오리엔트(Orient)레코드사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회사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등 다수의 곡을 발표했다. 1957년 대한레코드 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 1961년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2년 6월 26일 사망했다.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진주강씨 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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