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글,시

가을 시

산천초목 2017. 11. 21. 14:23

 

 

만추        -  정태현       

 

 

푸른 하늘 흰 구름

 

높아만 가면

 

나는 몰라라 나는 몰라라

 

내 마음을

 

그 누가 가져가

 

 

바람 부는 언덕에

 

나 홀로 앉아서

 

애꿎은 풀잎만 뜯어 날리네

 

 

바람소리 갈잎 소리

 

밀리어 오면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

 

나도 모를

 

이 마음을 어이해

 

 

노을 지는 숲길을

 

홀로 거닐면

 

낙엽은 떨어져  가을만 깊었네

 

 

 

 

그대여 가을입니다   - 김설하

 

선홍빛 나뭇잎 우수수 떨어져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면

시리도록 파란 하늘 머리에 이고

문득 어디라도 떠나고 싶은

그대여 가을입니다.

 

따가운 햇볕 쏟아져서

섬세한 손길 쓰다듬으면

햇곡식 찰랑찰랑 살 붙는 소리

햇과일 단물 드는 냄새 육혹하는

그대여 가을입니다

 

느티나무 숲에서 온 산들바람

잠 못 이루는 그대 창가 기웃거리면

홑이불 목선까지 끌어올리고

귀뚜라미 자장가에 소록이 잠드는

그대여 가을입니다.

 

고독은 무시로 찾아오는 늪

혼자만의 슬픔으로 앓는 외로움도 지병

책갈피 끼워 넣는 단풍잎처럼 추억에 살고자

누군가를 만나 시린 어깨 기대고픈

그대여 가을입니다

 

 

가을날  - 김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가을은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   - 김태광
 
우리 맞잡은 손에
땀을 나게 만들던 여름도
밤 손님처럼 다가오는 가을에는
어쩔 수 없나보다.

가을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더욱 생각나게 하는 힘이 있나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너의 얼굴이 또 아른거리니.

괜 시리 방에 혼자 있으면
서랍을 뒤적거리기도
수첩을 꺼내보기도
이처럼 가을은 혼자 지내기엔
너무 아쉬움이 남는 계절인가 보다.

조금은 쌀쌀한 새벽에
너와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
이슬 냄새나는 가을바람을 느끼고 싶다.
                   
홀로 서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분위기를 더할 때
너와 입 맞추고 싶다.
가을은 이렇게 연인들의 마음을
가만 못 있게 하나보다.
 

 

 

단풍  -  김종상

 

빨갛게 익어가는 감을 닮아서
잎사귀도 빨갛게 물이 들었네.
감나무에 떨어진 아침 이슬은
감잎에 담겨서 빨강 물방울.


샛노란 은행알이 달린 가지에
잎사귀도 노랗게 잘도 익었네.
은행나무 밑으로 흐르는 냇물
은행잎이 잠겨서 노랑 시냇물

 

 

추수   - 손정모

늦여름 햇살까지 꽉꽉
이랑 가득 채우고도
가만히 들녘에 서면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두려움

올해의 수확은
그 얼마나 되며
수지 타산은 맞을까
마음, 자꾸만 무거워지지만

과거에 휩쓸려 스러진
숱한 햇살과 땀방울에서
극락조의 꿈으로 빚어지는
알곡의 환생을 본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
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 이야기   - 고은영
        
아련한 기억
먼 그리움
데리고 오는 가을 밤은
만삭의 보름달

어둠 타고
사랑만 고집하는
붉은 가슴
  
두루두루
인간의 동네에서
정 염을 불태우다가

성황당 고갯마루
잔가지에 걸려
밤새 울음 울어  
토해낸 퀭한 무채색 빈속

서글픈 뒷이야기만
소리없이 눈물 흘리며
바람에 쓸쓸하게 서성대

 

 

가을  들 꽃    -  차 영섭
                                   

너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난 시인이 아니야
어쩜, 넌 이름이 없어
더 아름다운지도 몰라
열매 같은 꽃
꽃 같은 열매
모두 기력 잃고 쓰러져가는 마당에
가냘픈 몸매 어디서
저런 기운 솟아나는 걸까
아롱아롱 당당한 기상 아름다워라
벌 나비도 떠나가고
가끔씩 찾아드는 바람만이 친구일 뿐
아무도 없는 쓸쓸함,
그 쓸쓸함으로 가을 들녘을 살린다
밤 하늘은 별이 있어 잠들지 않고
푸른 바다는 갈매기 있어 살아있는 것처럼,
지난 밤 찬 공기에 더 맑아져 순결해진 꽃옷
꽃이라 피어서 행복해 하는
초췌한 얼굴들, 그리고 초혼.
마냥 그 자리에서
때 되면 피고 지는 작은 그리움들
이제 널 꽃이라 부를 수 있어
나도 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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