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에 닻을 내리고 떠나지 못하는 추억에 머무르며

영화음악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산천초목 2017. 6. 13. 10:08

 

1960년 르네 클레망의 작품으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The Talented Mr. Reply〉를 원작으로 한 범죄 드라마.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던 알랭 들롱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모방 본능과 부에 대한 갈망과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탐욕을 절제된 화법으로 그리고 있다. 1999년 같은 원작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리플리〉(The Talented Mr. Reply)라는 제목으로 다시 만들었다

- 등장인물 -

톰 리플리(알랭 들롱) : 재주는 많고 머리는 비상하지만 가난한 청년으로 필립 그린리프의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필립을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데려가는 일을 맡았다. 돈을 벌기 위해 필립의 잔심부름을 들어주며 보필하지만 필립이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킬 기미도 없고 인간적인 모욕을 주자 그를 살해한다. 필립의 시체를 바다에 버린 뒤 필립 행세를 하며 부유함을 즐기지만 필립의 친구 프레디에게 정체가 들통나게 되자 다시 그를 죽이고 모든 죄를 필립에게 덮어씌운다. 완전범죄가 확실시되자 그는 필립의 애인 마르쥬의 마음도 얻어 새로운 삶을 계획하지만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간다.

필립 그린리프(모리스 로네) : 톰이 친구라는 기억은 전혀 없지만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로 옆에 두고 이용한다. 아버지의 재산 덕택에 무위도식하는 삶에 익숙해진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는 인물이다. 수시로 톰을 무시하고 애인인 마르쥬에게까지도 모욕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 톰을 조롱하다 죽음을 맞는다.

마르쥬(마리 라포레) : 필립의 애인으로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필립 때문에 늘 마음을 태운다. 필립이 그녀의 원고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일을 계기로 크게 싸우고 그의 요트에서 내리지만 필립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흔적을 찾아 헤맨다. 필립이 프레디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은둔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톰을 보며 마음을 의지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톰 리플리는 필립 그린리프의 아버지에게 필립을 미국으로 데려오면 5천달러를 준다는 제안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놀고 있는 필립을 데리러 온다.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도통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필립은 아무 데나 흥청망청 돈을 쓰고 여자들에게 지분대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톰은 필립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불쾌한 요구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준다. 필립은 톰과 친구였다는 사실조차 기억이 안 난다며 그를 무시하지만 재미있다는 이유로 그를 옆에 붙여두고 잔심부름을 시키고 초라한 행색을 비웃는다. 필립의 애인 마르쥬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의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한다. 필립과 마르쥬 그리고 톰이 함께한 요트 여행에서 마르쥬가 쓰고 있던 책의 원고를 필립이 던져버리자 화가 난 마르쥬는 요트에서 내린다.

바다 위에 톰과 필립 둘만 남게 되자 톰은 그간 필립이 자신을 무시해왔던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듯 그를 죽여 바닷속으로 던진다. 육지에 올라온 이후 그는 필립 행세를 하며 돈을 인출하고 호화로운 호텔에 머문다. 필립이 사라지자 마르쥬를 비롯해 필립 측근들이 그를 찾기 시작하지만 톰은 필립과 톰을 번갈아가며 행세해 모두를 헷갈리게 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필립의 친구 프레디가 톰을 의심하자 톰은 프레디를 죽인 뒤 필립이 살인자인 것처럼 꾸민다. 필립이 프레디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증거가 확실시되고 남자친구를 잃고 외로웠던 마르쥬마저 톰에게 마음을 열게 되자 톰은 자기 삶의 가장 완벽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행복에 젖는다. 바로 그 순간 팔기 위해 인양된 필립의 요트에 필립의 시체가 걸려 육지로 딸려 올라온다.

 

〈태양은 가득히〉의 톰은 여러모로 배우 알랭 들롱의 실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는 섹시하지만 다소 덜 지적이고 지나치게 완벽한 외모 때문에 남자 ‘브리짓 바르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여섯살 때 이혼했고 그는 가톨릭계 기숙학교를 다녔지만 바르지 못한 행실 때문에 여러 차례 퇴학을 당했다.

그는 열네살에 학교를 떠나 잠시 의붓아버지 밑에서 정육점 일을 하기도 했고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역시 바르지 못한 행실 때문에 영창까지 갔다가 불명예제대를 했다.

이 일 저 일 전전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데이비드 O. 셀즈닉 아래 있는 스카우터 눈에 띄어 영화배우의 꿈을 꾸게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배우가 되기 위해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던 도중 이브 알레그레 감독에게 배역을 제안받아 프랑스에서 데뷔하게 된다. 〈태양은 가득히〉는 알랭 들롱을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이다.

알랭 들롱의 파란만장한 전력은 ‘톰 리플리’의 불가해한 과거와도 유사성을 갖는다. 톰은 학벌이나 재산은 없지만 필립을 살해한 이후 주도면밀한 태도를 보면 다방면에 상당한 경험과 지식을 소유한 인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필립의 요트를 모는 데도 아무 어려움이 없고 능숙한 솜씨로 여권을 위조하며 필립의 서명을 모사하기 위해 프로젝터를 구입해 연습할 정도로 치밀하다. 게다가 마르쥬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사로잡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특히 순진하고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초반 톰 리플리와 필립의 가슴에 단도를 꽂아넣은 이후의 톰은 동일인이지만 전혀 다른 내면을 가진 존재처럼 보인다. 톰의 섬세하지만 믿을 수 없어 보이는 눈빛, 후줄근한 셔츠로는 감출 수 없는 수려한 외모, 다정하게 유혹하는 듯하지만 진심이 없어 보이는 태도. 자신의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자를 쟁취하기 위해 로맨틱한 수작을 거는 여유. 이와 같은 톰의 이중성은 알랭 들롱이라는 자연인으로서 배우가 가진 사적 아우라와 묘하게 오버랩되며 시너지 효과를 뿜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