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추억에서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박애의별 - 박재삼-
그대를 보는 이 눈이
이를테면, 안 그럴까.
캄캄한 밤하늘 많은 별들 중에서
유독 반짝이며
한 별이 금을 그으며
휘황찬란히 다가오는 것과 같이
그렇게 감개를 섞어
이루어진 관계인데,
천년 만년 갈 것같이 느껴졌는데,
그대와 나는
불과 몇십 년 후면
하나의 유성으로 떨어지며
서러운 이별을 해야 하는 길이
운명으로 예비되어 있었나니.
이제는 서글프게도
별이 하나만 아니고
온갖 별이 박애(博愛)로써 박애로써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네.
산에 가면 - 박재삼-
산에 가면
우거진 나무와 풀의
후덥지근한 냄새,
혼령도 눈도 코도 없는 것의
흙냄새까지 서린
아, 여기다, 하고 눕고 싶은
목숨의 골짜기 냄새,
한 동안을 거기서
내 몸을 쉬다가 오면
쉬던 그때는 없던 내 정신이
비로소 풀빛을 띠면서
나뭇잎 반짝어림을 띠면서
내 몸 전체에서
정신의 그릇을 넘는
후덥지근한 냄새를 내게 한다
한 - 박재삼 -
감나무쯤 되라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뻗을 때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뻗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ㅣ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설움이요 전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춘향의 마음 - 박재삼 -
큰칼 쓰고 옥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는 옛날 성학사 박팽년이
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단심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설움이 사모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의 외론 혼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 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단심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하단 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 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단심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단심
깊은 겨울밤 비바람은 우루루루
피칠 해 논 옥창살을 들이치는데
옥(獄)죽음한 원귀들이 구석구석에 휙휙 울어
청절 춘향도 혼을 잃고 몸을 버려 버렸다
밤새도록 까무러치고
해 돋을녘 깨어나다
오! 일편단심
믿고 바라고 눈 아프게 보고 싶던 도련님이
죽기 전에 와 주셨다 춘향은 살았구나
쑥대머리 귀신 얼굴 된 춘향이 보고
이도령은 잔인스레 웃었다 저 때문의 정절이 자랑스러워
`우리 집이 팍 망해서 상거지가 되었지야'
틀림없는 도련님 춘향은 원망도 안 했니라
오! 일편단심
모진 춘향이 그 밤 새벽에 또 까무러쳐서는
영 다시 깨어나진 못했었다 두견은 울었건만
도련님 다시 뵈어 한을 풀었으나 살아날 가망은 아주 끊기고
온몸 푸른 맥도 홱 풀려 버렸을 법
출도(出道) 끝에 어사는 춘향의 몸을 거두며 울다
`내 변가(卞哥)보다 잔인 무지하여 춘향을 죽였구나'
오! 일편단심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자랐다.
1953년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61년 ‘60년대 사화집’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한(恨)의 세계를 주로 표현하였다.
이 후 현대문학사·대한일보사 기자를 역임했으며, 삼성출판사에서 근무하였다
1953년 《문예》에 시조<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추천되고,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 <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이 신구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그의 시는 가난과 억울함 등을 우리의 전통적 가락에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춘향이 마음」이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추억(追憶)에서」와 같은 초기 시에서는
한국적 정서인 슬픔과 한의 세계를 살아 있는 언어인 구어(口語)투의 시어로 구사하여 표현하고 있다.
박재삼의 이런 시세계는 우리 전통 서정시의 세계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특히 여성적인 어조를 통하여 슬픔이 내면화된 정조를 그려내고 있다.
박재삼의 시는 전반적으로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후반기에는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관심과 평범한 시적 언어를 통하여
넉넉하고 긍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의 13번째 시집인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는 이런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