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시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 수 권

산천초목 2022. 10. 8. 10:14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여승(女僧)        - 송수권 -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이별의 장소 또는 여러 갈래의 번뇌와 고뇌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여승에 대한 순수했던 사랑의 감정이나 열정과 관련된 심리 상태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맑고 순수한 사랑의 상징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모시옷 한 벌      - 송수권 -

 

어머니 장롱 속에 두고 가신 모시옷 한 벌
삼복 더위에 생각나는 모시옷 한 벌
내 작은 몸보다는 치수가 넉넉한 그 마음
거울 앞에 입고 서보면
나는 의젓한 한국의 선비
시원한 매미 울음소리까지 곁들이고 보면
난초잎처럼 쏙 빠져나온 내 얼굴에서도
뚝 뚝 모시물이 떨어지지만
그러나 내 목젖을 타고 흐르는 클클한 향수
열새 바디집을 딸각딸각 때리며
드나들던 북소리
가는 모시올 구멍으로 새나고
살강 밑에 떨어진 놋젓가락 그분의 모습은
기억 밖에 멀지만
번갯불과 소나기를 건너온 젖은
도롱이의 빗물들
등 구부린 어머니의 핏물이 떠 있다
아 어머니의 손톱 으깨어진 땀냄새 땀냄새
피모시 훑다 깨진 손톱
울 어머니 손톱
밤하늘 기러기가 등불을 차넘기면서
뿌려놓은 한숨 같은
열세 베 가는 올의
모시옷 한 벌.

 

 

혼자 먹는 밥            -송수권-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生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짚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묵호항         - 송수권 -

 

​비가 오는 날 고모를 따라 고모부의 무덤에 갔다

검은 배들이 꿈틀거리고 묵호항이 내려다보였다

고모는 오징어를 따라 군산 여수 목포 앞바다를 다 놔두고

전라도에서 묵호항까지 고모부를 따라왔다

나는 실로 이십 몇 년 만에 고모부를 찾았다

고모부는 질펀한 동해에서 돌아와 무덤 속에 잠들었다

폭풍이 치고 온 산과 바다가 울고

독도 바깥 대화퇴 잠든 어장을 우산으로 가리며

늙은 고모의 등이 비에 젖지 않게

나는 우산대에 박쥐처럼 붙어 눈물을 떨구었다

사는 일은 무엇일까?

공동묘지의 벌겋게 까진 잔등이 비에 얼룩지고

비명처럼 황토흙의 빛깔들이 새어나왔다

외짝 신발 하나를 묻고 봉분을 짓고

<오매 오매 날 무얼라고 맹글었는고 짚방석이나 맹글 일이제....>

흐렁흐렁 울음 속에서도 황토흙처럼 불거져 나온

저 전라도의 간투사間投詞들

오늘 나처럼 고모부 내외가 낯설게 이삿짐을 풀던 날도

묵호항은 이렇게 흔들리고만 있었을까

 

갯메꽃       - 송수권 -

 

채석강에 와서 세월따라 살며

좋은 그리움 하나는 늘 숨겨놓고 살지

수평선 위에 눈썹같이 걸리는 희미한 낮달 하나

어는 날은 떴다 지다 말다가

이승의 꿈 속에서 피었다 지듯이

평생 사무친 그리움 하나는

바람 파도 끝머리 숨겨놓고 살지

 

때로는 모래밭에 나와

네 이름 목터지게 부르다

빼마른 줄기 끝 갯메꽃 한 송이로 피어

딸랑딸랑 서러운 종 줄을 흔들기도 하지

 

어느 날 빈 자리

너도 와서 한번 목터지게 불러 봐,

내가 꾸다 꾸다 못 다 꾼 꿈

이 바닷가 썩돌 밑을 파 봐.

거기 해묵은 얼레달 하나 들어 있을 거야

부디 너도 좋은 그리움 하나

거기 묻어놓고 가기를

 

운주사 운(雲住寺 韻)       - 송수권 -

 

눈 감아도 들리네 천불산 골짜기 쩌렁쩌렁

아직도 천 년 세월 살아서 골풀무 치는 소리

쇠창날은 돌 속으로 돌 속으로 스미어들어

뜨거운 혼 형상을 지으면서 한 송이 꽃으로 피고

불꽃을 문 돌가루 비산비야에 자우룩히 떠서

망치와 징, 쇠좆메를 들고 쫓겨 온 사람들

아 통성(通性)도 없이 통성도 없이

이서방이나 김서방 함물댁이나 여산댁들

한밤내 모닥불 지피고 내게 이르는 말

오금 펴 앉지도 못하고서도 못하는 세월

명화적(明火賊)떼나 되라 하네 활빈당이나 되라 하네

저 들머리 나자빠진 시무룩한 돌미륵들

너는 떨거지떼 말고 구름에 가 살지도 말라 하네

이 세상 끝을 지켜선 산꼭대기 와불을 세우라 하네

눈 감아도 보이네 피울음 산울음 쩌렁쩌렁

발가벗은 채 뜨거운 불 가슴에 품고

아직도 살아서 퍼드러지는 골풀무 치는 소리

나루 불빛 노를 젓지도 말고 구름 뒤에 숨은 배처럼

살라하네

 

나팔꽃      - 송수권 -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 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댓잎파리의 맑은 숨소리

 

송수권(1940~2016) 시인 

출생 : 1940. 3. 15. / 전라남도 고흥 / 사망2016. 4. 4.
학력 : 서라벌 예술학원문예창작학 학사
데뷔 : 1975년 시 문학사상’ 신인상에서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수상 : 2013년 제5회 구상문학상 본상2012년 제8회 김삿갓문학상
경력 : 순천대학교 인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2005.08 순천대학교 인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작품도서 71건 

전남 고흥군에서 태어나,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서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시집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 동학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들의 땅>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10시집 <파천무> 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

<신화를 삼킨 섬-흑룡만리> 등이 있으며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 <들꽃 세상(토속꽃)>

<여승> 육필 시선집 <초록의 감옥> 3인 시선집 <별 아래 잠든 시인> 민담시선집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시를 읽는 아침> <사랑의 몸시학>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

<태산풍류와 섬진강> <남도기행> 음식문화 기행집 <남도의 맛과 멋>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 기행> 산문집 <아내의 맨발> <송수권 시 깊이 읽기>

<한국 대표시인 101인 시선집> 등이 있다.

문공부예술상, 전남문화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