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유곽에서 / 이성복
정든 유곽(遊廓)에서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병(病)을 돌보던
청춘(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일본(日本)인가, 일식(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나신(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다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혁명(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韓族)의 별
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希望이라면
우리는 언제 絶望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강가에서 3
저렇게 밀려가면서도
당신은 제자리에 계십니다
저렇게 파랑치고 파랑치면서도
당신은 머물러 계십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밀려가고 밀려오면서도
나와 함께 계시는 당신
당신에게 이끌려 기어코
나는 흐르고야 맙니다
오, 한없이 떨리는 당신
거리
내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역겨워
짜증이 나기도 하였지요
흐드러진 꽃나무가 머리맡에
늘어져 있었어요
내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역겨워
얼어붙은 거리로 나서면
엿판 앞에 서 있는 엄마의 등에
버짐꽃 핀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때로 내 사랑하는 것이 역겨워
떠날 궁리를 해보기도 하지만
엿판 앞에 서성거리는 엄마의 등에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대 가까이 2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꽃피는 시절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비단길 1
깊은 내륙에 먼 바다에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도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겼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바람 몹시 파랑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새
잠든 잎새들을 가만히 흔들어봅니다
처음 당신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날처럼
깨어난 잎새들은
다시 잠들고 싶어합니다
나도
잎새들을 따라 잠들고
싶습니다
잎새들의 잠 속에서
지친
당신의 날개를 가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깃을 치며 날아가는
당신의 모습이 보이겠지요
처음 당신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날처럼
잎새들은
몹시 떨리겠지요
숨길 수 없는 노래 2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람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숨길 수 없는 노래 3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
빛에 눈먼 두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슬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1
어두워가는 산을 가리키며
당신이 아니, 저기 진달래가.....
저기도, 저 너머에도.....
당신이 놀라 가리킬 때마다
어둠과 피로 버무린 꽃이
당신 손끝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나는 처음 꽃피어날 것 같았습니다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 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기시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李晟馥 (1952. 6. 4 ∼ )
1952년 경북 상주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 참가하여 글쓰기 재능을 보였다. 1968년 경기고교에 입학했으며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학 불문학과에 입학,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다. 1976년 복학, 황지우 등과 교내 시화전을 열었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 등단했다. 대구 계명대학 강의 조교로 있으면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1999년 현재 계명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있다.
첫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 과감한 시 문법의 파괴와 번뜩이는 비유로 평론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시적 특징은 고통스런 세계에 대한 공격적 목소리, 화려한 수사, 연상작용을 통한 이미지 연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