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시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 원태연

산천초목 2016. 1. 4. 22:08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원태연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많은 괴로움이 자리하겠지만
그 괴로움이
나를 미치게 만들지라도
미치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하나의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추억은
떠나지 않은 그리움으로
그 마음에 뿌리깊게 심어져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기다림
원태연

가장 고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전화를 걸지요
고된 날에는
망설임도 힘이 들어 쉬고 있을테니까요

가장 우울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편지를 쓰지요
우울한 날의 그리움은
기쁜 날의 그리움보다
더욱 짙게 묻어날테니까요

고된 일을 하고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날이면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을 달래며
그대의 회답을 기다리지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Ⅰ
원태연
티격태격 싸울 일도 없어졌습니다.
짜증을 낼 필요도 없고
만나야 될 의무감도
전화해야 하는데 하는 부담도
이 밖에도 답답함을 느끼게 하던
여러가지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만나볼 겁니다.
전에는 늦게 들어올 때
엄마보다 더 눈치가 보였는데
이제는 괜찮습니다.
참 편해진 것 같습니다.
근데... 이상한 건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아무 할일이 없어진 그 시간에
자꾸만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이제는...
혼자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Ⅱ
원태연
심심한 저녁시간이면
특별한 용건 없이 전화 걸어
몇 시간이고 애기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소개팅 같은 거 할 때면
좀 찔리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 들게 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참 많은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인기스타보다 더 보기 힘든 사람이 생긴 것과
아파도
열이 많이 나도
나 아파 하고 기댈 곳과
열 재줄 손이 없어졌고
생일이나 의미가 있는 날
선물을 고를 일도 기대할 일도 없어진 것이
또 그렇습니다.
토요일 오후나 공휴일 아침이면
당연히 만나고 있어야 하는데
친구를 만나고 있거나
TV를 보고 있으면
이제는 우리가 아니란 걸 실감하게 됩니다.
어떤 이름이 부르고 싶어지거나
어떤 얼굴이 보고 싶어지면
그때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유비무환
원태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너무 자주 보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무심히 지나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 많이 가지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그 마음 가져가려 할 때
큰 상처 없이 돌려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그 아름다운 기억이
한 방울 눈물로 기억되지 않도록

 

 

[e갤러리] 한국적 추상화란 이런 것…유영국 `무제`


때로는 우리가
원태연
때로는 그대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으면 합니다.
모자랄 것 없는 그대 곁에서
너무도 작아 보이는 나이기에
함부로 내 사람이 되길 원할 수 없었고
너무도 멀리 있는 느낌이 들었기에
한 걸음 다가가려 할 때
두 걸음 망설여야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그대와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사랑의 시간이 지나간 후
친구도 어려운 이성보다는
가끔은 힌들겠지만
그대의 사랑얘기 들어가며
영원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담없는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수진 인연이었으면 합니다.
서로가 잘되는 꼴을 못보고
헐뜯고 싸워가며
재수없는 날이나 한번 마주치는 인연이었으면
생살 찢어지는 그리움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가지 말라 하셔도
원태연
가라 하시면
가야 하지요
마음 밖으로 멀리멀리
아주 가라 하시면
돌아보지 말고
가야 하지요

가지 말라 하셔도
가야 하지요
연민만으로 사랑하기엔
구속이 너무 심한 걸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까지
남아 있을 자신도 없는 걸

가라 하셔도 가슴 아픈데
가지 말라 하시면
못내 눈물 보이고 말지요
사랑하고 계셨구나 알 수 있지요
그 한마디로도
오랜 세월 그리워해도 될
이유가 되지요


술버릇
원태연
술 마시면 어김없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한잔 한잔 보태갈수록
더 진하게 떠오릅니다.

술 취하면 어김없이
그대에게 전화를 겁니다.
일곱 자리 누르는데
칠십 번도 더 주저하다
그런 내가 초라해 보여
그냥 내려놓습니다.

술이 깨면 어김없이
어제일을 후회합니다.
쓰린 속 냉수로 씻어내며
그저 한편에 자리했던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그 날을 떠올려 봅니다.

 


아름다운 당신
원태연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잘생긴 턱선과
시원한 이마를 가진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터무니없는 많은 기억으로 상처 주시고
그 터무니없이 많은 기억으로
치료를 해주시는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 이름 떠올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지만
그 이름 떠들어댈 자격이 없는 몸이라
눈물을 머금고
그 사람 이름을
아름다운 당신이라고만 합니다.


평생을 두고 기억나는 사람
원태연
평생을 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알고부터
그것이라고 바래야 했다.
어쩌면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며
슬프디 슬픈 사랑으로 기억 속에 남아
그 가슴 촉촉이 적시울 수 있게 되기를
이룰 수 없게 된 사랑을 대신해 바래야 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 눈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기를
참으로 부질없음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믿으며
진작부터 그런 바람으로
평생을 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애원이라도 하며 바랬어야 했다.


서글픈 바람
원태연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그덕 문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 잔의 차를 시켜 놓고
막연히 앞잔을 쳐다본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 속 깊이 인사말을 준비하고
그 말을 반복한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서는 발길
초라한 망설임으로
추억만이 남아 있는
그 찻집의 문을 돌아다본다.


이런 날 만나게 해 주십시요
원태연
이런 날 우연이 필요합니다
그 애가 많이 힘들어하는 날
만나게 하시어
그 고통 덜어줄 수 있게
이미 내게는 그런 힘이 없을지라도
날 보고 당황하는 순간만이라도
그 고통 내 것이 되게 해 주십시요.

이런 날 우연이 필요합니다.
내게 기쁨이 넘치는 날
만나게 하시어
그 기쁨 다는 줄 수 없을지라도
밝게 웃는 표정 보여 줘
잠시라도 내 기쁨
그 애의 것이 되게 해 주십시요.

그러고도 혹시 우연이 남는다면
무척이나 그리운 날
둘 중 하나는 걷고 하나는 차에 타게 하시어
스쳐 지나가듯
잠시라도 마주치게 해 주십시요.

 


원태연 시인

출생:1971년 5월 21일  서울

학력: 경희대학 체육학과 졸업

데뷔: 1992년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수상: 2014 제6회 멜론뮤직어워드 뮤직비디오상 외 1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