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1970년대 골목길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나목(裸木)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의 신발이
늘 떠나면서 살았다,
길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은,
어느 때부턴가는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
두엄더미 퀴퀴한 냄새를 되찾아 나서면서
싸리문 흔들던 바람을 되찾아 나서면서.
그러는 사이 나의 신발은 너덜너덜해지고
비바람과 흙먼지와 매연으로 누렇게 퇴색했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아직도
세상 사는 물리를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퀴퀴하게 썩은 냄새 속에서
이제 나한테서도 완전히 버려져
폐기물 처리장 한구석에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버려진 신발짝들에 뒤섞여
나와 함께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목계 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 시인, 대학교수
출생: 1936년 4월 6일 (만 78세), 충북 충주시 | 쥐띠, 양자리
데뷔: 1955년 문화예술 '낮달' 등단학력: 동국대학교 영어 영문학
1997 ~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1996 ~ 격월간 세상의 꿈 편집기획위원
2001 ~ 화해와전진포럼 상임운영위원
2002 만해문학상
2007 제4회 스웨덴 시카다상
2009 호암상 예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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