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귀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를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 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고 은 - 시인.
본명은 은태(銀泰), 법명은 일초(一超). 여러 재야단체와 집회에 참가하면서 주로 사회비판의식이 담긴 시를 썼다.
아버지 근식(根植)과 어머니 최점례(崔點禮)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43년
미룡국민학교에 들어가 조기졸업하고 1946년 군산중학교에 수석 입학해 미술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6·25전쟁 때
3개월 동안 강제동원되어 비행장 복구작업을 한 뒤 자주 정신착란을 일으켜 가출했다. 1·4후퇴 때 선유도로 피난했다가
군산으로 돌아와 군산북중학교 교사 등을 지냈다. 그뒤 방황을 거듭하다가 1952년 불가(佛家)에 들어가 탁발하는 등
많은 기행(奇行)을 남겼는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여러 곳에서 나올 지경이었다. 1962년 환속해 폭음과 방랑을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주지대리 등을 지냈다. 1969년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잠시 근무한 것이 유일한
직장 경험이다. 1974년부터 민족민주운동에 앞장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운동단체에 참여했다. 1977년 조태일과 함께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민주청년협의회 고문,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등을 지냈다. 1979년 6월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했다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0·26사태를 감옥에서 맞이했다. 1979년말 석방되었으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대구교도소에서 복역중 귀 수술을 받았다. 1982년 건강이 악화되어 8·15 특사로 풀려난 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 의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