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흐르는곡 Les larmes de Joie / Oliver Toussaint
-정희성 -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저문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
흐르는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한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물에
달이 뜨는구나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 정 희 성 -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정희성(鄭喜成, 1945년 ~ )시인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용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부터 숭문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16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1981년에 제1회 「김수영 문학상」,1997년에「시와시학상」, 2001년에제16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문단에 나온 지 40여 년 가까이 지났는데, 시집을 다섯 권밖에 내지 않은 과작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