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시

어느하오 / 신동집

산천초목 2008. 9. 4. 10:21

 

어느하오    - 신동집 -

 

아이들이 갖고 놀다 버린 풍선(風船)이

떴다는 말다

시름없이 방안에 딩굴고 있다.

아이들엔 이미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추석(秋夕)의 뒷날,

아이들은 어딘지 밖으로 나가

메우지 못한 제마다의 꿈을 찾고 있는지

마당귀엔 망가진 잠자리채도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 혼자 남아 있으면

상념(想念)은 유동(遊動)하는 미립자(微粒子)와도 같이

흔들리는 풍선(風船)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오(下午) 한나절 해 그늘은 여물고

한동안을 잠기는 라디오의 바로크.

뜰에 핀 너댓 그루 장미는

조만간 찬 바람에 시들고 말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를 더 피어서

내 눈을 적시게 해 줄 것을 바랄 뿐이다.

바람 차면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투명(透明)한 玉(옥)빛 정밀(靜謐)이

헐벗은 나에게도 남아 줄 것을.

예지(叡智)는 무엇인가

처음으로 일러 준 스승이여

응시(凝視)마저도 지금은 하나의 잠인가.

 

 

목숨          - 신동집 -

 

목숨은 때묻었나.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 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오라.

 

 

송신(送信)      - 신동집 -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출생1924. 3. 5. 대구광역시

사망2003. 8. 20.

데뷔1948년 시집 '대낮'

수상1994년 순수문학상1992년 제37회 대한민국예술원상1990년 도천문학상

경력198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82 계명대학교 외국학대학 학장